A.I. - Artificial Island™벽을 쌓은 것에 대해서는 kidD™님의 글을 읽어주시길..
베를린 대학에 대한 잡설은
여기에1989년 독일통일 직후 실시된 '독일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정치가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에서 비스마르크를 2위로 밀어내고 압도적 표차로 1위로 꼽힌 사람은 아데나워였습니다.
사실 아데나워의 경우는 이런저런 굵직한 이벤트들에서 좋은 장면을 많이 연출하긴 했지만, 집권 후반기에 보인 무능이나, 권력에의 집착, 외교적 실패 등으로 인해 찬반이 꽤나 갈릴 듯한 정치가입니다만, 한국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 1위로 꼽힐 수 있었듯이, 죽었지만,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고,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았기에, 표가 모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많은 시간이 흘러. 비스마르크와 같은 입장에서 역사적 심판을 받게 된다면, 비스마르크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이지요 :b
'독일통일' '히틀러의 조력자'등의 저자인 귀도 크놉씨가 '비스마르크 이후의 독일은 전쟁으로 치닫고 국가가 무너졌지만, 아데나워 이후의 독일은 경제성장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었다. 이것이 비스마르크와 아데나워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평가는 전형적으로 역사성, 사회성을 무시한 평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와서 '세종대왕 이후 조선은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졌지만 김영삼 이후 한국은 전쟁은 겪지 않았고,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이것이 세종대왕과 김영삼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평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
...이런...글의 주제에서 벗어났군요..
1953년 6월17일. 동독에서 일어난 자유를 바라는 노동자들의 봉기는 유혈진압으로 끝이 납니다. 그 장례식장에서 아데나워는 '자유를 지키려는 이 영웅들에 대해 슬픔과 동정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8년간 계속된 노예신분에 저항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패전 이후 소위 공산진영에 남겨진 사람들은 억압받고 있었고, 자유진영으로의 탈출은 끊이지 않습니다. 특히, 베를린에서는 쉽게 '탈출'할 수가 있었기에, 베를린은 골칫덩이였지요. 베를린으로 물자와 사람을 수송하기 위해 다니는 비행기도 장막™이 쳐진 후에는 재미가 없었고 말이죠.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은 '서방정책'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소련과의 회담에서 포로석방이라는 국내정치용 카드를 위해 분단고착화의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학자들의 비난은 받았지만, 선거에서는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우호적인 역사가들도 독일통일의 순간을 그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임을 인정하고, 통일의 공적을 그에게 돌리지도 않습니다.
1958년 여자이름의 서기장™씨의 독일사에서 말하는 소위 최후통첩™*때 그가 보인 추태 - 우왕좌왕하며 아무 개념없이 대처했던 것 - 는 그의 외교정책이 슬슬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최후통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더이상 국민유출™을 좌시할 수 없게되자, 결국 모스크바의 선택은 '벽'이었습니다. 1961년, 베를린을 둘로 쪼개 서베를린을 육지의 섬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 때에도 아데나워의 대처는 모스크바에 유화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었습니다만, 분개하고 있던 국민들은 그런 모습에 실망했지요. 비스마르크가 사망할 때 이미 소년이었던 영감™님은 이 시기엔 이미 80이 넘은 나이였습니다만..그 나이에 텔레비젼 토론에 출연해서 변명해보려 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고, 빌리 브란트를 모욕**해 더욱 신망을 잃게 되었습니다.
벽의 건설이 많이 진행된 후에나 베를린에 슬쩍 왔으나 야유만 받게 되었죠. 사실 뭔가 하려고 했어도, 잘 안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만, 벽이 만들어지는 걸 두손 놓고 보고 있었던 그를 비난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벽(실제적으로나 다른 의미로나)의 건설을 저지하지 못했고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것이 그에 대한 평가에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그의 공을 모두 가릴 수는 없고, 그렇기 때문에 독일국민에게 여전히 기억되고, 사랑받는 것이겠지만 말이죠..
(..사실, 저는 분단고착화..같은 것은 먼 훗날 역사적으로 비난받을지언정 당시로서는 최선에 근접해 있었고, 지지를 얻었다는 점에 더 주목합니다만...아데나워는 좋아할 수가 없군요)
덧1) 갑자기 왜 이런? ...글쎄요..
덧2) ..비스마르크가 2위라 기분나빠서 이렇게 적은 것인..(지도?!)
* 최후통첩이란 1958년 11월 후루시초프 연방 서기장이 서방 연합군에 대해 베를린의 지위에 대한 협정을 무효화하고 베를린 전체를 동독의 수도로 삼겠으니, 서베를린 시민들은 6개월 안에 퇴거할 것을 요구한 것을 가리킵니다.
** 빌리 브란트는 실제로 사생아였지만, 텔레비젼 토론에서 그것을 지적하며 모욕한 것을 시민들은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재 한국 정치판을 생각하면...1960년대의 독일 국민들은 정말 의식이 높고, 신사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군요. :b
덧3) 아데나워 자신에 대해서는 글쎄요..나중에 좀 더 적어보도록 하지요(그말 아무도 안믿는다;;)
덧4) 왜 또 갑자기 ™을?! 트랙백한 곳의 특성 상..으흠..